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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경상일보신춘문예-소설]과녁 - 이서안 / 문예창작대학원 06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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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 : 윤문영
 

오른발을 반 폭 든 사내가 투수의 몸짓으로 비수를 내리꽂는다. 힘이 실린 비수는 나무판을 향해 날렵하게 날아갔다. 살진 몸에 비해 꽤 날렵했다. ‘턱’ 힘이 실린 칼이 바람을 타고 나무판 진공에서 숨이 멎었다. 다시 비수는 소리를 내지르며 일제히 판에 꽂혔다. 왼쪽 다리를 절뚝거리며 사내가 나무판을 향해 걸어간다.

구리철사에 휘감긴 칼자루가 광선에 번들거렸다. 단검의 크기는 손바닥 크기로 바지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였다. 꽂힌 칼들을 하나씩 뽑아낼 때 사내의 옆모습이 서늘하게 느껴졌다. 칼들이 박혀 있을 때는 몰랐는데 멀리서 나무판의 파진 홈들이 일정한 모양을 이루었다. 테두리가 옻칠한 듯 자연스럽게 음영을 이룬 탓이었다. 그것은 희미하게나마 사람의 얼굴 같았다. 민의 촉이 파르르 섰다. 34시간 동안 잠복근무로 지쳤지만 그의 촉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사내의 얼굴은 온통 일그러져 판에 온갖 것을 쏟아낼 참이었다. 단순히 연습 삼아 던지는 비수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고난도의 특전사 무술을 익히는 것도 아닌, 형사의 오랜 직감으로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이었다.
“예? 철수하라고요? 이미 빠져나갔어요?”

등에 땀이 차오르고 이마에 진땀이 났다.
통장이라는 단어에 4억이라는 숫자가
바코드처럼 머리를 콕콕 찔러댔다.
산업공단에서 18년을 아끼며 번 돈이었다.

에이, 제기랄! 민은 핸드폰을 운전석 의자에 내동댕이쳤다. 쌓였던 피로가 득달같이 몰려왔다. 임대아파트가 밀집된 주차장에서 잠복 34시간 만에 반장은 철수를 명했다. 자꾸 일이 풀리지 않고 꼬여만 갔다. 빠져나갔다는 말에 위에서 쓴 물이 역류했다. 신참은 코까지 골며 아예 의자 뒤로 고개를 젖혀 자고 있었다.
“어이, 이봐, 빨리 일어나!”

세상모르고 자는 신참내기를 보자 민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귀찮은 혹을 언제까지 달고 다녀야 하는지, 반장이 기껏 생각해준 게 햇병아리 신참이었다. 세워둔 차를 슬그머니 빼내면서 민은 비수를 던지던 사내의 모습이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머지않아 이곳을 다시 올 것만 같아 뒤통수가 당겼다.

 

“아무리 인력이 딸린다 해도 그렇지 지구대에서 몇 달 놀다 온 놈을 붙이다뇨? 잘 뛰는 놈 붙여 달라 했더니…웬걸,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당장 때려치우든지 말든지 해야지, 이건 원….”
신참 교육을 민에게 붙인 반장이 못마땅했지만 미제 살인사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반장을 건드려 좋을 건 없었다. 애꿎은 책상에다 서류뭉치를 냅다 쳤지만 그까지였다. 민이 꼬리를 내리는 찰나에 날카로운 눈매의 반장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야! 너, 입 닥쳐. 아무 말 마!”

자신을 향해 삿대질하는 반장이 다음에 내뱉을 말을 짐작한 민은 자리를 떨치고 나왔다. 몇 달 전 마포의 묻지마 사건의 범인을 아직도 못 잡은 상태였다. 수사는 답보상태였고 결국 미제사건으로 처리될 판국이었다. 이번 달만 해도 세 건이 오리무중이었다. 검거해서 조서를 꾸민 사건은 폭행사건 한 건이었다. 반장은 유독 강력 1반을 추켜세웠다. 강력 1반 반장은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논리였다. 부하 직원 잘 둬 승진가두를 달리고 있다나 뭐라나. 틀림없이 강력 1반에 반장 아킬레스가 있는 거라고 신참이 떠들어댔다. 민의 책상에는 몇 달 동안 범인 검거를 위해 수집한 증거소집 자료들이 들쑥날쑥 쌓여 있었다. 미제 사건 뭉치 서류가 민의 신경을 긁을 대로 긁어놓았다. 치질 환자가 변을 제대로 보지 못한 것처럼 찜찜하고 불쾌했다.
“이름? 주민번호? 주소? 뭐라고요? 신월동? 이봐요. 정확하게 말하세요! 아니, 술 취한 채로 남의 집은 왜 들어갔어요?”
옆 파티션에 주택에 침입한 주정뱅이를 붙들고 조 형사가 씨름했다. 민은 주머니에서 사우타 티켓 두 장을 꺼내어 신입을 향해 손짓했다.

곱창으로 떠들썩한 골목길이었다. 식당마다 사람들로 웅성거렸다. 젊은 무리가 재잘대며 소주병을 주고받았다. 복은 자신도 한때 저런 때가 있었나 싶었다. 젊은 여자가 소주병을 들며 “위하여”를 외쳤다. 젊은 여자의 얼굴이 누군가와 겹쳐 보였다. 그 여자도 소주병을 찰랑찰랑 흔들며 잔을 부딪쳐 “지화자” 라고 소리를 질렀었다. 하지만 오늘은 도통 사람 만날 기분이 아니었다. 허나 복은 뿌리치지 못했다. 고향형님이었다. 일찍 부모님 돌아가시고 몇 안 되는 친척 중의 한 사람이었다.
“수권아, 내 몇 년간 널 봐 왔지만 참 답답하다. 아니, 몸이 그나마 움직일 때 일을 해서 벌어야지. 기초수급자, 그 몇 십만 원에 목매고 있어. 지나간 일은 다 잊어야 한다.”
형님이 만나자고 연락이 왔을 때만 해도 그는 조금은 기대감이 생겨 나간 거였다. 이런 염장 지를 소리나 듣고자 나간 건 아니었다. 지금 자신에게 조언이다 뭐다 잰 척하는 고향 형님을 향해 그는 묵묵히 술만 자꾸 들이켰다. 형님이 그의 망가진 몸 상태를, 그가 지금 무엇을 실행하려는지 제대로 알 리가 없었다. 얼마 전 배수관 공사판에서 무리하게 일한 탓에 오른팔의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만성두통에다 요즘 들어 허리까지 묵직하게 당겨왔다. 7년 전 뇌경색의 후유증은 여러 합병증을 유발했다. 일자리를 알아보겠다고 말하자 형님은 자신의 조언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새벽부터 내린 비가 그칠 줄 모르고 내렸다. 종일 누워있었는데도 복의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허리는 통증으로 마구 쑤셨다. 찬 공기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져 몸이 마냥 처졌다. 의식과 두 눈만 멀쩡할 뿐 몸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이렇게 속절없이 죽어가는지도 몰랐다. 죽음을 생각하자 허탈한 웃음이 지어졌다. 복은 일순간 방이 목관처럼 여겨졌다. 눈을 카메라로 생각하고 줌을 조절해 좁혀보았다. 복이 누워 있는 방은 관보다 조금 넓을 뿐 별다를 게 없었다. 집안에 어떤 생물의 흔적도 없었다. 생물이 있다면 복이었다. 이대로 의식과 눈이 정지되었으면 하고 오래전부터 생각했지만 어김없이 눈은 떠졌고 의식은 살아 움직였다. 진짜 감행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기에 신이 여분의 시간을 남겨주었는지도 몰랐다. 신을 믿지 않았지만 신이 있다면 자신이 이 일을 하는 것은 눈감아 주는 게 마땅하다고 여겼다. 두 눈을 감기 전 복은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망가진 몸이라도 추슬러 일어나야 했다. 자신에게 이 일마저도 없었다면 그는 진즉 산 사람이 아니었다. 마음을 가다듬는 일만 남았다. 서두를 필요도 없었다. 이틀의 여유가 있었다. 그는 주변을 하나씩 처리했다. 이틀 후면 이 모든 지상의 흔적들과 끝이었다. 공과금과 관리실의 관리비까지 말끔하게 정리를 해두었다. 남은 돈은 혹여 모를 장례비용으로 부탁해놓았다. 남에게 조금의 폐도 끼치기 싫어하는 그였다.
방문을 열자 부엌을 향해 즐비한 빈 소주병에서 익숙한 알코올 냄새가 물씬 풍겼다. 일주일 분의 소주병이었다. 하루에 네다섯 병씩 먹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복이었다. 복은 술이 깬 상태가 가장 두려웠다. 잠재된 기억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쳐 생채기를 내었을 뿐 아니라 생채기가 난 자리는 감당이 안 될 만큼 쓰라리고 아팠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거의 다 잊을 수 있었다. 술은 고통당한 자의 치료제였다. 망각으로 이끄는 술이 있어 복은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술과 더불어 그는 매일 한 주먹 분량의 약을 먹었다. 색색의 알약은 복이 뇌출혈로 쓰러진 후 늘 함께 했다. 여자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복은 술에 약했다. 소주 한 잔 정도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정도였다. 그런 그를 술 못한다고 여자가 자주 놀려댔다.
휴대전화가 거듭 울렸다. 딱히 이 시간에 전화 올 때는 없었다. 얼굴을 씻던 복은 젖은 손으로 휴대전화의 폴더를 황급히 열었다. 갑자기 소리가 뚝 그쳤다. 머쓱해진 그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기 시작했다. 10년 전의 자신만만했던 그는 온데간데없고 늙고 추레한 50대 중반의 사내가 눈을 껌벅이며 서 있었다. 자신의 얼굴을 살펴보던 그의 인상이 험악하게 굳어진다. 휴대전화가 다시 진저리쳤다. 사회복지담당자의 따지는 투의 전화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달 하청기관에서 일하셨네요. 두 달 일할 정도면 몸이 괜찮다는 말 아닌가요?”
 “몸이 아픈데도 생활비가 없어 겨우 일한 겁니다. 저번에 와서 확인하셨듯이 제가 4급 장애인 것 아시잖아요?”
 “물론 복수권 씨 몸 불편한 것 알죠. 하지만 일한 급여가 이렇게 뜨면 우리도 곤란해져요. 기초수급 혜택을 기다리는 대기신청자가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다음에 또 이러시면 수급대상자에서 제외됩니다. 이번 달부터 일하신 만큼 몇 달 차감된 금액이 통장에 들어가는 줄 알고 계세요.”
등에 땀이 차오르고 이마에 진땀이 났다. 통장이라는 단어에 4억이라는 숫자가 바코드처럼 머리를 콕콕 찔러댔다. 산업공단에서 18년을 아끼며 번 돈이었다. 며칠 뒤면 다 끝나는데 왜 이 담당자에게 통화 내내 굽실거렸을까 싶어 화딱지가 났다. 기초수급을 정지하든 말든 이제 상관없는 일이었다. 4대 보험 들어가는 사업장은 이렇게 골칫거리였다. 대구에 있는 사촌 누님에게 신세 진 것을 어느 정도 갚으려는 생각에 공사장에서 일한 게 탈이 났다. 몇 년을 술로 보낸 결과 몸은 만신창이 되었다. 정부에서 주는 45만 원의 기초생활자금이 유일한 대책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고 그는 입속말로 주절거렸다. 젊은 양반이 뭐라도 먹고 힘을 내야 한다면서 203호 할머니가 갖다 준 국을 라면포트에 데우며 그는 이틀 뒤에 있을 장소의 동선을 머릿속에 하나씩 그려갔다. 달력에 검정 동그라미를 볼펜으로 몇 번 그린 숫자와 요일을 눈알을 굴리며 보고 또 보았다. 여자가 이토록 가까운 곳에 살고 있으리라고는 꿈엔들 몰랐다. 복은 몇 달 전 정부가 기초수급자에게 임대하는 임대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호텔 사우나에 손님은 많지 않았다. 신입은 사우나 티켓을 내민 선배를 감동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2주 동안 자신을 알게 모르게 멍청이 취급하던 선배의 호의였다. 이 호텔 사우나 물은 알칼리 온천수인데다 시설이 좋아 소문이 자자하다고 신입이 너스레를 떨었다. 목욕물이 다 거기서 거기지, 라고 말했지만 신입이 떠든 대로 수질이 좋아서 그런지 피부가 한층 더 부드럽게 느껴졌다. 수증기를 내뿜는 증기탕에서 사람들의 얼굴형체는 알아보기 힘들었고 말소리만 조곤조곤 들렸다. 민의 귓가에 어디서 들어본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상대의 등에는 뱀이 등을 타고 어깨너머로 넘어가는 문신이, 다른 사람의 등에도 커다란 잉어가 입을 반쯤 벌리고 있었다. 일순간 형사의 직감이 발동했지만 민은 억지로 눈을 감았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맞은편에서 어디서 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어럽쇼! 민이 얼마 전 잡아넣은 도박범들이었다. 어찌 된 거지? 저것들이 어째 멀쩡하게 이 시간에 사우나를 하고 있을까? 구정물을 뒤집어쓴 듯 불쾌감이 확 끼쳤다. 둘도 민을 금세 알아봤는지 민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어디서 본 형님들인가 했더니 어, 이게 누구십니까? 마포 강력계 민 형사님, 아니십니까? 요즈음 일거리가 없나 봅니다. 사우나를 다 오시고… 범인 잡으러 안 갑니까?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요.”
 “이… 새끼들, 콩밥 먹고 있어야 할 놈들이 지금 어찌된 거야?”
 “아니, 콩밥이라뇨? 우린 그런 것 잘 취급 안 하는데….”
한 놈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거드름을 피웠다. 반장이 고과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사건만 맡긴 지 벌써 두 달째였다. 민은 자신이 반장이었다고 해도 직속상관 무시하는 부하가 못마땅할 거라는 걸 알았지만 도박단 검거는 반장 시킨 대로 한 거였다. 경기도 산속에서 몇 달을 잠복근무해 도박단을 검거했었다. 험한 산에서 눈. 비를 만나는 건 다반사였다. 추위와 배고픔, 마지막 선물은 아내의 이혼선언이었다. 승진이다 뭐다 욕심내지 않고 온몸으로 뛴 결과치고 참으로 혹독했다. 우라질, 근데 이 두 놈이 버젓이 호텔 사우나를 넘나들고 있다니! 민은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았다. 주부들 상대로 등 쳐먹고 사는 놈들이었다. 이 새끼들 잡는다고 6개월을 수사 자료 모으고 쫓아다녔지 않았나, 깊은 산마다 천막을 치고 수억의 도박판을 벌이던 놈들이었다. 비아냥거리는 상통을 깨부수고 싶었지만 폭력배의 든든한 뒷배가 있는 저놈들을 건드려봐야 돌아오는 것은 무지막지한 식칼이었다.
“그래, 변호사에 돈 좀 박았나 보네. 참말로 니들 솜씨 좋다. 몇 달 쉬고 있어라. 다음에 또 우리 안 만나겠나.”
민은 저들에게 결코 밀릴 수 없다는 듯 호언장담을 했다.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 둘에게 손으로 살짝 등을 토닥이며 민은 나왔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신참은 머리를 연신 갸우뚱했지만 신참이 도박단 검거 과정을 재차 물었다면 아마 신참을 신나게 두들겨 팼을지도 몰랐다.

좁은 골목을 벗어나자 후미진 공터가 들어왔다. 낮에 봐둔 공터였다. 공터는 말라버린 잡초가 담장높이만큼 자라서 얼핏 보면 작은 덤불 같았다. 공터 옆 담벼락에 다다르자 가슴이 조금씩 뛰기 시작하며 이마에 땀이 맺혔다. 안정제를 먹었는데도 가슴 뜀은 멈추지 않았다. 손바닥에 땀이 차올랐다. 밤인데도 여자의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칠이 벗겨진 콘크리트 주택은 재개발해야 할 정도로 낡아 있었다. 주택 아래에 가로등이 있었지만 거리가 멀어 희미했다. 때맞춰 달도 구름 속으로 종적을 감추고 쉬 고개를 내밀 것 같지 않았다. 공터에 자란 잡초는 몸을 숨기기에 적합했다. 일을 진행하기가 한결 수월해질 터였다. 집 뒤에는 울타리의 담이 반 정도 허물어져 있어 복은 쉽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음에 안도했다. 업체의 정보에 의하면 여자의 남편이 집을 나가는 시간은 오후 11시 30분경이라고 했다. 여자의 남편은 야간 경비 일을 하고 아침 9시 퇴근이었다. 정보가 정확하다면 오늘 이 집에는 여자 혼자만 있는 거였다. 그는 인터넷 흥신소를 잘 선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몇 흥신소업체에 그동안 뿌린 돈을 생각하자 부아가 치밀었다. 복은 침을 잡초 위에 탁 뱉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 일러스트 : 윤문영
 

정확하게 11시 30분이 되자 야구 모자를 쓴 남자가 철제문을 열고 나와 반대편 골목으로 들어섰다. 여자의 남편이었다. 여자에게 말로만 들었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남자였다. 남자는 꽤 나이 들어 보였다. 죽일 년. 이혼했다고 버젓이 거짓말한 걸 생각하면 이가 부드득 갈렸다. 진즉 끝장내었어야 했다. 그날 여자가 그렇게 도망갔을 때 어떻게든 죽였어야 했는데 복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다. 지루하게 하루하루를 여자의 이름을 곱씹으며 붙들고 있었던 걸 생각하자 자신이 너무 한심스럽고 못나게 여겨졌다. 복은 지난순간 그가 죽지 못한 변명을 애써 지금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칼은 그녀를 향하고 있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사람이 태어나서 겪는 일 중에 사소한 우연은 없는 것이었다. 저년을 죽이려고 이 칼이 그 먼 곳에서 자신한테 왔다고 복은 여겨졌다. 비록 그것이 하찮은 물건일지라도 말이다. 그 칼은 복과 여자의 숙명이었다. 여자랑 태국 여행 갔을 때 세공품 점에서 산 거였다. 칼은 정교하고 날카로웠다. 여자들이 호신용으로 들고 다니기에 제격이었다. 늦게까지 주점에서 일하는 여자에게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그 가게를 지날 때 발길을 멈추게 했다.

복은 이후 이 칼을 본떠 다섯 개를 더 만들었다. 시골 오일 장터의 솜씨 좋은 대장장이는 감쪽같이 찍어낸 듯 칼을 만들어주었다. 자루 세공하는 데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해서 복은 자루에 구리철사를 감았다. 구리의 무게가 보태진 칼은 무게만큼 적중률도 높았다. 복은 여자가 창문을 잠그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여자는 평소에도 문 잠그는 걸 싫어했다. 창문을 거의 잠그지 않는 게 여자의 습관이었다. 창문을 잠그면 가슴이 답답하다고 늘 열어두곤 했다.

훔쳐갈 것이 있으면 훔쳐 가라지였다. 집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다 끝나는 일이었다. 그가 문밖으로 나올 일은 없었다. 단칼에 끝내면 되는 거였다. 복은 발걸음에 힘을 빼고 집 뒷담이 무너진 곳으로 몸을 숙였다. 어디서 모를 치자향이 은은하게 풍겨왔다. 여자의 가슴을 파고들면 알싸한 누룩 냄새가 퍼져 복을 휘감았다. 탄탄하고 매끈한 몸매였다. 순한 막걸리가 목을 타고 내려갈 때의 느낌도 들었다. 주점을 하는 여자에게 자연스럽게 밴 냄새였다.
“좋은 냄새가 나.”
 “종일 술 팔았는데, 술 찌꺼기 냄새가 좋다고?”
 “너한테 배인 건 다 좋아.”
여자의 귓불을 혓바닥으로 쓸어 올리며 복은 말하곤 했다. 집 안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복은 정적의 끝이 견디기 힘들었다. 여자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휙 밀려왔다. 흥신소는 잘못된 정보면 착수금을 돌려주겠다고 장담했었다. 복은 왠지 그 자신만만한 말에 신뢰가 갔었다. 복의 조심스런 발걸음이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갔다. 사위의 어두움과 달리 복의 심장은 안정제를 먹었는데도 드세게 뜀박질했다. 복이 베란다 큰 창문을 열자 예상한 대로 문이 스르르 열렸다. 여자가 문을 잠그지 않은 걸 파악한 복은 마음이 놓였다. 퀴퀴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손전등 빛이 거실 중앙을 좌우로 밝혔다.

“복수권씨, 김경자씨 아시죠? 어떻게 아시죠?”
 복의 입언저리가 파르르 떨었다.
  그는 결심한 듯이 입술에 침을 바르며 민에게 되물었다.
“알긴 알지만 무슨 일입니까?”

몇 발자국 발을 뗀 복은 물컹한 물체에 부딪혀 손전등을 떨어트려버렸다. 손전등 굴러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다 틀려버렸다는 낭패감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손전등을 찾아 집어 든 순간 거실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복은 혼미한 상황에 얼이 빠져버렸다. 복을 향해 여자가 배시시 웃으며 서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복이 자신의 앞에 놓인 이 황당함에 대처할 준비를 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여자의 눈빛은 그를 처음 안았을 때의 눈빛처럼 사랑스럽고 따뜻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은 옛날의 얼굴이 아니었다. 폭삭 늙은 얼굴이었다. 복은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주저앉은 그의 허벅지에 날카로운 칼끝의 감촉이 느껴졌다. 빨리 끝내야 했지만 손이 주머니로 들어가지 않았다. 오른쪽 주머니에 칼끝이 재차 허벅지를 눌렀다. 여자가 찰싹 달라붙더니 예전처럼 애교를 떨기 시작했다.
“수권 씨, 왜 이렇게 늦게 퇴근했어? 오늘 손님이 많아 매상이 올랐잖아? 자기 주려고 뽈찜해 놓았다 말이야.”
여자가 엉겨 붙으며 침을 한쪽으로 질질 흘렸다. 심지어 두 팔을 뻗어 수권의 목까지 휘감았다. 복은 여자가 정상이 아니란 걸 단박에 알아챘다. 복이 여자를 힘껏 밀치자 여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치마 속 팬티를 난데없이 벗으면서 그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이 꼴을 보려고 칠년을 벼렸단 말인가 싶어 복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여자의 목을 수백 번도 더 조르고 여자의 배와 가슴을 수천 번도 더 찌르는 연습 끝의 실행이었다. 오늘 같은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필사의 의지로 칼을 갈듯이 마음의 분노를 삭여왔다. 한껏 힘주어 쥔 그의 오른손이 부르르 떨렸다. 그는 그 떨림조차 허용하고 싶지가 않았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세차게 파동 대는 뜀박질이 피부 바깥으로 드러난 것 같아 어쩔 줄 몰랐다. 단번에 심장 깊숙이 찔러버리면 끝날 일이었다. 이 장면을 얼마나 그려왔는가. 그의 의식 속에서 그녀는 수도 없이 죽었다가 고스란히 살아났다. 신기할 노릇이었다. 낮이면 죽었다가 밤이 되면 기억 열차를 타고 몇 꾸러미씩 풀어놓고 떠났다. 여자가 풀어놓고 간 한 꾸러미의 양은 어마어마하게 많고 집요할 만큼 생생했다. 그런 밤이면 그는 상처에 짓눌리고 쓰라렸다. 소주병을 몇 번 까도 그 쓰라림은 여전히 쓰라렸다. 그런데 저 여자는 칠년의 지난날을 말갛게 잊고 있었다. 오직 자신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만 오롯이 남아 해맑게 웃고 있다니, 그는 주머니 속의 칼을 맞은편 나무 액자를 향해 냅다 집어던졌다. 복수고 나발이고,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칼은 반대편 검정 소파 밑 깊숙이 가로로 놓여 있었다. 어쩌다 떨어트린 것처럼 보였다. 칼에는 여자의 지문이 묻어 있었다. 형광 불빛에 번쩍이는 칼날은 칼날보다 칼자루가 더 번뜩였다. 붉은 구릿빛철사로 정교하게 감겨 있었다. 단검이었다. 칼끝은 오랫동안 쓴 흔적이 있었고 날카로웠다. 여자의 아랫도리는 벗겨져 있었고 저항한 흔적은 없었지만 공교롭게도 사인은 뇌출혈로 인한 뇌진탕이었다. 정액검사결과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성폭행범이라면 시도조차 못 한 것이었다. 단검의 모양도 특이했다. 전문 킬러들이 쓰는 칼은 아니었다. 손바닥만큼 길이도 짧았지만 사람을 죽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물적 단서가 되는 건 단검이었다. 원한 관계일 수도 있었다. 여자의 지문이 묻어 있어 여자의 남편에게 물어봤지만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처음 보는 칼이라고 했다. 자기 아내한테 칼은 결코 없었다는 거였다. 그렇다면 범인의 칼이 틀림없었다. 여자가 용맹스럽게 칼을 뺏고 범인과 겨루다 뇌진탕으로 쓰러졌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여자의 입고 있는 옷이나 몸에는 어떤 몸부림의 흔적도 없었다. 범인이 집안에 들어온 표시도 전혀 없었다. 방마다 문은 잠겨있었고 범인의 발자국이나 흔적은 눈 씻고 봐도 없었다. 게다가 여자는 경미하나 치매 환자였다. 단검이 문제였다. 단검만 없었다면 뇌진탕으로 인한 단순 사고사였다. 피해자의 가족들은 여자가 당뇨에다 고혈압, 여러 지병을 앓았다고 했다. 찜찜한 것은 여자가 팬티를 벗고 있었다는 거였지만 치매증세가 있었다고 하니 그것도 별 증거는 되지 않았다. 범인이 집 안으로 들어온 어떠한 단서도 없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만약 살인사건이었다면 흔적이 남아 있어야 했다. 흔적을 꼬집자면 굳이 단검이었다. 가족들은 왜 그 단검이 거기 있었는지 의아해했다. 그렇다면 여자가 범인에게 문을 열어준 것이 분명했다. 여자의 자세는 벌러덩 드러누운 자세였다. 뚱뚱한 몸매였으니 바닥에 떨어지면서 뇌진탕을 일으킨 게 틀림없었다. 근데 여자의 표정이 너무도 편안해 보였다. 여자는 잠자는 듯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뇌출혈로 인한 사고니 단순사고로 처리해도 되지 않을까요? 소파 밑에서 칼이 나왔다고 강도 침입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게다가 제가 남편한테 물어 철저히 조사해봤지만 없어진 물건도 없다고 해요. 원한관계도 아니고, 이건 단순 사고사 맞아요.”
신입 강이 가볍게 주절거렸다. 민은 입빠른 그의 입을 가볍게 수첩으로 치며 거실 벽면을 가리켰다. 신입의 눈이 그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성경 구절이 적혀 있는 유리 없는 나무액자가 벽에 걸려있었다. 액자에는 칼이 꽂힌 자국과 칼을 빼낸 흔적이 보였다. 지문의 출처를 봐서는 여자가 빼낸 게 틀림없었다. 여자는 이 액자에 박힌 칼을 빼내려다 칼과 함께 떨어졌고, 떨어지다 칼은 소파 밑으로, 여자는 뇌진탕으로 즉사한 것이었다.
“뭐, 어찌 됐든 사고사는 맞잖아요?”
현장검증을 끝내고 민은 그 단검을 증거물로 가져왔다. 민은 책상에서 그 칼을 빙글빙글 돌리다 선뜻 머리를 스치는 뭔가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몇 달 전 임대아파트 공원에서 사내의 단검이 느닷없이 떠올랐다. 몇 미터 떨어져 있어서 꼭 그 단검과 일치한다는 걸 증명할 수는 없었지만 민의 촉은 자꾸 그 사내에게 심증이 꽂혔다. 의외로 비슷한 단검은 많을 수도 있었다. 피해자의 남편은 이 칼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소파 아래에 칼이 있을 이유도 없었고, 아내의 지문이 그 칼에 묻어 있었다는 것은 더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눈치였다.

비수를 던지던 판은 나무에 뎅그렁하게 그대로 걸려 있었다. 민은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오후의 아파트 공원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민은 단검을 꺼내 남자가 서서 던지던 위치에서 던져보았다. 칼은 나무판에 떨어지지 않고 허공을 가로지르다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판을 벗어난 칼은 꼴이 말이 아니었다. 이제 칼 던지는 실력마저 낙제점이야!민은 혼잣말로 읊조렸다. 머리회전도 점점 낡아가고 몸도 예전 같지가 않았다. 퇴물이 돼 가고 있는 민을 아내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 도장을 찍었는지, 무거운 몸을 일으키는데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삼세번이다. 민은 스스로 억지다짐을 했다. 흙 묻은 단검을 손으로 털어서 다시 신중하게 던졌지만 또다시 나무판을 살짝 비켜나갔다. 민은 조급증이 일었다. 왠지 앞으로도 줄곧 수틀린 앞날의 예고편을 보는 것 같았다. 심호흡을 가다듬고 투수가 공을 던지듯 천천히 몸을 비틀었다. 나무판 모서리에 칼이 퍽 꽂혔다. 꽂힌 칼의 끝과 자국을 살피던 민의 눈동자에 힘이 실렸다.
피해자 측이 국과수에 부검을 원하지도 않았고 뻔한 사건을 조서를 꾸밀 필요도 없었지만 민은 범인의 흔적이 말끔하게 없어진 궁금증이 일었다. 반장은 시답잖은 사건에 소일 말고 미제 사건들 방치할 거냐며 다시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민은 촉이 아직 살아있음을 증명하고 싶었다. 여자의 가족은 단순 사고사로 처리해달라고 했다. 지병과 치매를 앓던 상태였으니 어디서 칼을 주워온 게 틀림없다고 했다. 여자의 남편은 아내가 칼을 몰래 숨겨두곤 혼자 칼을 던져 빼내려다 떨어진 거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가족들이 이렇게 쉽게 알리바이를 맞추는 것에 민은 더 씁쓸해졌다. 마치 여자가 빨리 죽기를 바란 투였다. 범인이 들어온 흔적이 없으니 어찌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민은 머리에 심한 두통을 느끼며 깼다. 숙직실이었다. 오전 10시. 늦게까지 마신 술에 지각이었다. 집이라고 들어가 봐야 반겨줄 사람 없는 빈 집이다 보니 언제부터 민은 빈집 냄새를 꺼리게 되었다. 범인을 추적할 때 어딘가 모르게 숨어서 튀어나올 순간을 기다릴 때보다 더 지독한 냄새가 빈집 냄새였다. 반장은 성질이 날 대로 나 입에서 고래고래 고함을 내질렀다
“이 새끼들아, 이번 달만 해도 미제사건이 세 건이다! 도대체 대한민국 형사라고 하는 놈들이 이걸 실적이라고 내밀어?”
회의실로 들어가는 복도에서 반장의 굴곡진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러 왔다. 민은 회의실 문도 열지 못하고 뒤돌아서야 했다. 하찮은 사건이든 큰 사건이든 뭔가 하나는 분명하게 끝장을 내고 싶었다. 민은 휴대전화로 신참을 불러냈다. 민이 탄 경찰차가 임대아파트로 향했다.

딩동. 딩동.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혹여 어디로 튀지 않았나 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민은 신참에게 문을 계속 두들겨 보라고 눈짓했다. 204호의 현관문이 천천히 열렸다. 사내는 자다가 문을 열어준 것 같았다.
“마포 강력계 경찰서에서 나왔습니다.”
사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복수권 씨 맞습니까? 김경자 씨 일로 몇 가지 확인하고자 합니다.”
경찰서로 연행해야 했지만 민은 애당초 복을 수배대상에 올리지도 않았다. 복은 쥐새끼 한 마리도 못 죽일 위인이라는 걸 민은 비수를 내 던질 때 단박에 알아챘었다. 도무지 알지 못할 게 인간이라지만, 인간이 악하다 해도 천성적으로 그렇지 못한 위인이 더러 있는데 복이 딱 그런 부류였다. 민의 오랜 형사 생활에서 체득한 직감이었다.
“복수권 씨, 김경자 씨 아시죠? 어떻게 아시죠?”
복의 입언저리가 파르르 떨었다. 그는 결심한 듯이 입술에 침을 바르며 민에게 되물었다.
“알긴 알지만 무슨 일입니까?”
 “제가 먼저 물었습니다. 묻는 말에 대답부터 하시죠? 어떻게 아십니까?”
 “저랑 2년 동거한 여자입니다.”
 “그때가 언제였죠?”
 “2009년부터였죠. 헤어진 지는 7년 2개월쯤 되었네요.”
 “근데 왜 헤어졌죠?”
민의 왜 헤어졌느냐는 물음에 복은 억울한 듯이 볼멘 목소리가 되었다.
“헤어진 게 아니라 그 여자가 제 돈을 가지고 도망간 겁니다. 시장 골목에서 주점을 하던 여자였어요. 아이 둘을 데리고 무척 살려고 노력하더라고요. 남편과 이혼했다고 해서 그런 줄만 알았죠. 2년간 살 섞고 살 동안 양다리를 걸치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눈치를 채지 못 했어요.”
복은 간간이 한숨을 내지었다. 민은 복에게 담배 피우느냐고 물으며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 민이 내민 라이터에 그가 불을 붙이고 길게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가파른 연기가 복의 얼굴 위로 피어오르다 공중을 흐느적거리며 이내 사라졌다. 말은 않고 담배를 뻑뻑 몇 번 빨던 복의 손가락으로 허연 담뱃재가 소리 없이 떨어졌다. 왼쪽 다리는 아까부터 미세하게 떠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보였는데 저와 사이가 가까워지면서부터 아이들이 보이지 않더군요. 이혼한 남편한테 보냈다고 해서 그랬나 보다 했죠. 부동산을 잘 아는 친척이 있다고 해서 돈을 맡겼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저 같은 병신이 없었던 것 같아요. 18년을 제대로 쓰지 않고 모은 돈을 덥석 여자한테 안겨주었으니까요. 여자한테 사내란 걸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통장을 맡겼는지도 몰라요. 땅을 사서 아담하게 전원주택을 지어 여자랑 사는 게 제 꿈이었으니까요. 어느 날 고향 형님이 여자 안부를 물어서 잘 지낸다고 했더니 말끝을 살짝 흐리더라고요. 여자가 주점에서 어떤 남자랑 심하게 다투더라고 해서 손님이었겠지, 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죠… 지금 이런 얘기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그때 여자를 바로 잡지 않고 왜 7년을 기다렸습니까?”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생긴다고 회사 보급 창고에서 자재를 꺼내다 뇌졸중이 왔어요. 두 달 만에 깨어났죠. 지금은 다리를 약간 절고 발음만 좀 정확하지 않지만 그때는 꼼짝없이 전신마비인 줄 알았어요.”
 “그때 김경자 씨는 몰랐습니까?”
 “아뇨. 제가 병원에 누워 있는 사이에 돈 갖고 달아난 거죠. 사람을 시켜 수소문 해보니 찾을 길이 없다 하더군요.”
복이 7년을 버틴 이유는 오로지 그녀를 죽이고 말 것이라는 일념으로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여자는 거실에서 넘어진 자세였고 사인은 뇌진탕과 뇌출혈이었다. 복은 여자가 죽은 줄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치매에 걸린 여자를 보자마자 복은 칼을 집어던지고 집 밖으로 나간 거였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창문을 닫았단 말인가. 그는 등산화를 신은 채 들어갔다고 했다. 거실 바닥 어디에도 등산화의 흔적은 없었다. 민의 촉이 섰다. 지문을 지운 사람은 바로 여자였다. 여자가 지문을 지우고 그 칼을 없애려고 거실 소파 끝에 발을 디디다가 뇌진탕을 일으켰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이건 순전히 민의 추측이었다. 복은 이 여자를 죽이려고 수만 번도 칼질을 시도했다. 정확하게 찌르기를 셀 수 없이 시도했건만 칼은 엉뚱하게도 다른 곳으로 날아가 버린 셈이었다. 복을 살인범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여자가 한 행동들이었다. 어쩌면 여자는 그가 찾아올 날을 기다리면 숨죽이며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집 안에서 이 사실을 입증해줄 그 어떤 단서도 없었다.
“죽이려고 들어갔지만 죽이지 못 했어요… 죽일 필요가 없었죠.”
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복을 위해 여자가 칼을 빼내고 복의 흔적을 지우려다 죽었다는 말을 하면 복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민은 잠시 망설여졌다.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집으로 침입할 때 문이 열려 있었나요? 신발도 신은 채였고요?”
 “예. 그 여자는 절대 문을 잠그지 않아요. 물론 신발을 신었죠. 등산화를 신었어요. 여자도 죽이고 저도 죽으려고 했으니… 지문이나 흔적을 지울 필요가 없었죠.”
복은 민의 얼굴을 멀뚱거리며 쳐다보았다. 근데 왜 그걸 묻나요? 하는 표정이었다. 문들은 잠겨 있었고 거실에 어떤 지문도 없었어요. 여자는 형씨가 던진 칼을 빼서 증거를 없애려고 하다가 뇌진탕으로 죽었어요. 죽은 사람 표정이 참 편안하게 보이더군요. 이렇게 말하려고 했지만 민은 끝내 입을 떼지 못했다.
“그년이 제가 자기를 죽이려했다고 신고했나보죠?”
 “아뇨, 김경자 씨는 얼마 전에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복수권 씨는 참고인 조사를 받으신 거고요.”
민은 반쯤 넋이 나간 복을 남겨 두고 나왔다.
“아이참, 바빠 죽겠는데 이래저래 꼬이네요. 괜한 시간만 낭비했어요. 선배님, 이번 사건, 그 뭐더라… 형법 26조, 중지미수 맞죠?”
 “어쩌면 내일 다시 와야 할지도 몰라.”
 “왜요? 이미 사건 종료됐는데…?”
민의 옆에 있던 신참이 나불거렸다.
“아가리 닥쳐, 인마!”
민은 혼자 남아 있을 그가 영 꺼림칙했다. 내일 그의 집을 다시 방문하지 않기를 마음속으로 빌며 페달을 밟았다. 민이 탄 경찰차가 그가 살던 임대아파트 쪽의 공원을 스쳐 지나갔다. 민의 눈초리가 자연스럽게 복이 비수를 던지던 나무판에 쏠리었다. 어찌된 일인지 점처럼 빼곡했던 칼자국들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무수한 칼자국이 있어야 할 판은 사포로 문지른 듯 반질반질하게 빛났다. 모를 일이었다. 햇살 때문에 착시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민은 눈을 부라려 다시 과녁판을 집중했다. 홀로그램 영상 속의 예리한 칼들이 어딘가를 향해 정신없이 날아갔다. 민이 칼을 적귀했다. 겹겹의 과녁판이 파동을 그리며 다가왔다 감쪽같이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정점에 민이 과녁판을 향해 헐떡이며 쫓아갔다. 민은 왜 달려가는지 무엇 때문에 달려가는지 모른 채 뛰는 것 같았다. 끼익. 브레이크 소리에 민은 눈을 화들짝 떴다. 속살을 보얗게 드러낸 나무판이 바람 따라 간들거렸다. 나무판에 복과 자신의 얼굴이 겹쳐 투영되자 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끝)

 



※ 당선소감 / 아버지 향한 그리움이 소설 쓰게 해

◀ 이서안

은빛 난무는 그리움과 함께 부두에 앉은 소녀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뱃고동을 울리며 배들이 총총히 떠나갔다 돌아오곤 했습니다. 아른거리는 수평선의 끝자락, 바다는 끊임없이 오롯한 동경으로 소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습니다. 잠든 막내를 깨워 새벽 수산물 시장을 돌아보며 하루를 시작하신 아버지, 소녀의 눈에 새벽 바다 정경은 또 하나의 신기한 세계였습니다. 평생의 사랑을 아버지께 받았지만 어린 딸이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는 A4 두서너 장의 기억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 그리움의 발현이 뒤늦게 소설을 쓰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기억에 남는 소설을 씀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소설을 써보라고 문학의 길로 인도해주신 윤후명 교수님, 작가의 길, 마음의 정진을 삶으로 보여주신 박상우 선생님, 소행성 문우들, 아낌없는 격려와 사랑으로 독려해준 가족과 시민공동체, 지인들에게 마음을 다하여 감사를 드립니다.

 

[약력]

-1963년 경남 마산출생
-국민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졸업

 

 

※ 심사평 / 기교 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그려내려는 우직함 읽혀져

◀ 한수산

최종심에 넘어온 8편의 작품은 한결같은 약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취약한 스토리텔링, 불분명한 주제, 부정확한 표현 그리고 이어지는 허술한 구성은 좀 더 치열한 습작기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논의된 두 작품은 ‘과녁’과 ‘엉덩이의 생존’이었다. 두 작품은 장단점을 비롯한 여러 의미에서 서로 대척점을 이루고 있었다.
‘엉덩이의 생존’은 그 지극히 즉물적이고 투박한 제목과는 달리 다른 응모작을 뛰어넘는 속도감 있는 문체, 수려한 문장, 적확한 어휘 선택 등에서 돋보였다. 신인다운 패기도 높이 살만 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치명적인 약점을 품고 있었다. 매춘이라고 조차 할 수 없는 동성 간의 섹스로 생활하는 주인공을 소재로 그것이 그려내는 주제가 지극히 비윤리적이라는 점이다. 끊임없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성적 표현, 여동생의 학대와 죽음이나 아버지 살해 등은 예술의 표현이 어디까지 허용되어도 좋은 것이냐 하는 현실적인 윤리문제에까지 닿고 있기 때문이었다.
‘과녁’은 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또 너무 구태의 진부함이 넘친다. 단편소설이 가지는 미덕의 하나인 간결함도 구성의 신선함도 찾을 수 없다. 결말이 예고되는 이야기의 흐름도 독자의 긴장감을 떨어뜨린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정통 단편소설의 구성에 성실하려는 진지함이 있다. 느려터진 이야기의 흐름도 소설적 기교 보다는 현실을 있는 대로 그려내려는 우직함에 더 힘을 준 작가의 뜻이 읽혀진다.
‘과녁’을 당선작으로 올리면서, 앞으로의 작품에서는 좀 더 문장을 가다듬는 노력과 압축미 있는 구성에 힘을 쏟기를 당부한다. 정통적인 소설기법에 충실하려는 작가의 수련이 좋은 작품으로 태어나기를 기대한다.

 

[약력]

-1946년 춘천 출생
-경희대 영문과 졸업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2016년 장편소설 <군함도> 27년만에 완결·출간
-장편소설 <부초>로 제1회 오늘의 작가상, 제36회 현대문학상 수상
-세종대학교 국문과 교수 역임

 

 

원문보기: http://www.ksilbo.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1634

 

 

 

출처 : 경상일보 | 2017.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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