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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고된 사람들에 ‘신바람 박사’표 처방 행복과 웃음으로 마음의 건강 회복 / 황수관(대학원 체육학과 박사과정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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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관 박사는 웃음 전도사로 유명했다.
한 TV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 특유의 눈이 안 보일 정도로 크게 웃는 모습.


황수관 박사는 생전에 20여 편의 저서를 남겼다.
사진은 2003년 발간된 ‘저 보세요, 저 보세요. 그래도 웃잖아요!’의 책 표지.


그는 어릴 적 가난해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
성인이 돼 고향 안강의 들판을 찾아 어릴 때 즐겼던 연을 날리며 즐거워하는 황수관.

“도전하는 자만 웃을 수 있다.
꿈은 크게, 목표는 분명히, 그리고 최선을 다하라!.”

“절대 포기 마라!”
신바람 박사 황수관이 극도의 어려운 환경을 극복한 비결이다.
그는 삶에 절망한 사람들이 이 방법을 깨달아 힘내기를 바랐다.

그는 의대를 나오지 않아 의사 자격증이 없다.
그런데도 연세대 의대 교수였다.

그는 환자의 병만 고치려 하지 않았다.
국민의 마음과 병을 한꺼번에 고치려 고민했다.
그래서 나온 처방이 웃음과 운동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중요한 이 두 요법을, 그는 쉽고 재미있는 강연으로 퍼뜨렸다.
그래서 숱한 사람들이 힘을 내고 건강을 되찾았다.

 


◆집념의 시골 소년

 

그의 고향은 경주 인접한 안강 소평마을이다.
깡촌이던 안강은 영남지방치곤 꽤 너른 들판이 있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가난했다.
그는 칠 남매 중 누나 두 명이 있는 장남이었다.

아버지 황봉룡 씨는 일제 때 가난을 벗기 위해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아버지가 히로시마 인근에서 체류하던 1945년 8월30일 태어났다.
어머니 구정순씨 뱃속에서 광복을 맞은 것이다.

아버지 황 씨는 광복 후 아내와 자녀들을 거느리고 고향 안강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안은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아버지는 가난했지만 정직하고 신앙심 깊은 사람이었다.

소년 황수관은 가난으로 배를 곯았지만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다.
그러다 통발로 미꾸라지를 잡거나 고구마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황수관은 안강북부초등학교를 졸업했으나 중학교 갈 형편이 못됐다.
그런데 가난한 사람도 공부시켜주는 학교가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포항 영일중학교였다.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산을 5개 넘고 형산강 건너 학교에 다녔다.
왕복 9시간 걸리는 길이었다.
아들이 고생하자 어머니는 1년 뒤 인근 안강중학교로 전학시켜 주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황수관은 고등학교 다닐 형편도 되지 않았다.
때마침 안강농고가 문을 열었다.
그는 전액 장학금을 받고 안강농고에 들어갔다.
그가 받은 장학금은 어머니가 고추밭 사는 데 썼다.

안강농고는 그가 들어갈 때 50명 입학, 3년 후 13명 만 졸업했다.
당시 문교부는 학생이 없다는 이유로 폐교했다.
모교가 졸업과 함께 사라진 것이다.

고교를 졸업한 황수관은 역시 대학 갈 형편이 안 됐다.
학비도 없을 뿐 아니라 농고 때 농사 만 배워 대학 갈 실력이 되지 않았다.

초등학생을 양성하는 교대는 돈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황수관은 농사일을 도우며 공부에 집중했다.
재수 끝에 황수관은 1964년 대구교대에 입학했다.
가난으로 중학교도 가지 못할 운명의 소년이 대학에 들어간 것이다.


◆교육은 씨앗 싹틔우기


황수관은 대구시내에서 초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면서 야간 대학과 야간 대학원을 다녔다.
사진은 1980년 경북대 교육대학원 체육교육학 석사를 받고 부인 및 세 자녀와 함께 한 황수관.


1960년대 말 대구 시내 초등학교 교사였던 황수관이 학생들과 경주 첨성대로 소풍 간 모습. (뒷줄 오른 쪽 서 있는 어른이 황수관)

청년 황수관은 대학엔 들어왔지만 먹고 자는 것이 문제였다.
그는 숙식 해결을 위해 부잣집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그는 어린 아이 셋을 밤늦게까지 가르쳤다.
그들을 재우고 난 후에야 그는 공부를 했다.
대구교대는 졸업생 280명 중 5등 안에 들면 경북 아닌 대구에서 교사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는 필사적으로 공부하여 졸업 때 우등상을 받았다.
결국 그는 대구시내 학교에 발령 받았다.
대구 근무 덕분에 그는 나중에 야간 대학과 야간 대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황수관은 1969년 손정자씨와 결혼, 신접살림을 차렸다.
사진은 이듬해 단칸 셋방에서 고추장을 담그고 있는 부인을 돕는 황수관.

교사생활 3년째 되던 해 황수관은 출근길에서 마주치는 처녀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
수녀가 되려던 동갑내기 손정자 씨였다.
황수관은 그 해 결혼했다.

교사 황수관이 대구 해안초등학교에 근무할 때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주려고 핸드볼을 가르쳤다.
아이들은 금세 실력이 늘었다.
아이들은 대구시 대회에서 우승, 경북도 대회에 진출하여 다시 우승했다.

전국 본선이 서울에서 열렸다.
아이들은 서울에 가본 적이 없었다.
여비도 없었다.
그는 아내에게 돈을 빌려 아이들을 서울로 데려 갔다.
아이들에게 짜장면도 사줬다.

아이들은 최선을 다했지만 준결승에서 4대 5로 지고 말았다.
아이들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긴장해서 오줌을 지리는 바람에 아이들을 안아주지 못했다.

그는 교육이 씨앗을 심는 것이 아니라 씨앗의 싹을 틔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이들의 잠재성을 키우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불가능은 없다

 

교사 황수관은 교직생활 10년째 접어들자 다시 공부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대구대 사회복지학과(야간)에 편입, 낮엔 가르치고 밤에는 공부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1978년 4년제 대학 졸업장을 딴 황수관은 다시 경북대 교육대학원 체육교육과 석사과정(야간)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생리학에 관심을 가져 새 운명을 개척하기로 결심한다.

1979년 10월 그는 14년 간 생업이던 교직을 버리고 무모한 공부의 길로 들어선다.
이듬 해 3월 경북대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1981년 5월 경북대 의대 연구원으로 들어갔다.

생리학은 체육학과보다 의대에서 더 다루는 학문이다.
그래서 체육학과를 졸업한 그가 의대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문제는 연구원 자격이어서 봉급이 거의 없다는 점과 의대 강의를 정식으로 들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는 청강생 생활을 시작한다.

교수들은 의대생도 아닌데 수업을 듣는다고 눈총을 줬지만 그는 버텼다.

청강생이다 보니 어떤 교수는 시험지를 주지 않았다.
그는 교수에게 “저도 공부했으니 시험지 좀 주시죠”라고 간청해 시험을 봤다.
나중에 교수가 그의 답안지를 들고 와 “청강생 답안지가 모범답안이네”라고 칭찬했다.

1987년 2월 그는 6년 간 경북대 의대 생활을 마치고 생리학 박사과정이 있는 국민대 대학원에 들어갔다.

박사과정 공부를 하던 그는 1987년 10월 일생일대의 성공을 경험한다.
연세대 의대 생리학 교실에 채용된 것이다.
42세 때였다.

처음 연세대에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이 암담했다.
해외 유명 대학 나온 사람들이 즐비했다.

그는 가장 잘 하는 일을 하기로 한다.
치료에 운동을 접목시킨 것이다.
운동의 빈도와 강도를 조절, 치료효과가 있게 했다.
또한 긍정의 마음을 심어주는 심리요법도 병행했다.
환자들이 점차 그를 찾았다.
3년 후 그는 국민대에서 생리학 박사학위도 받았다.

황 박사는 1999년 10월까지 12년 간 연세대 교수로 복무하다 이후에는 밀려드는 외부 강의로 외래 교수로만 지냈다.

 


◆인생의 잭팟이 터졌다

 

연세대에서 근무한 지 10년, 지난 1997년 2월 그는 하루아침에 전국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한 방송에 출연, 전공인 ‘신바람 건강 강의’를 한 것이 히트한 것이다.

온 국민은 그를 ‘신바람 건강 박사 황수관’으로 불렀다.
TV를 틀면 어디서나 나와서 행복과 웃음을 전파했다.
그는 학교 강의에다 국내외 초청 강의, 방송 출연까지 하느라 바빴다.
인생의 잭팟이 터진 것 같았다.

그는 그 동안 쌓은 내공을 예능적 재능으로 분출했다.
박사이면서도 오히려 자신 위상을 떨어뜨리는 일명 ‘자폭 개그’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가 전달하는 주제들은 언제나 감동과 눈물이 있었다.
방황하던 사람들은 그의 메시지에 힘을 얻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말 엄마’라는 강연은 그 중 백미로 꼽힌다.

그의 부모가 일본 히로시마 인근에 살 때다.
미국 폭격기가 집 위로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놀란 아버지는 집에서 나오라고 소리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정신 차린 아버지가 돌아와 보니 만삭의 어머니는 다섯 살 큰딸과 세 살 작은딸을 끌어안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시는 달아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로부터 5년 후 6ㆍ25 전쟁이 터졌다.
피난길에 오른 가족 옆으로 수류탄이 폭발했다.
지게 지고 있던 아버지는 수로 쪽으로 피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짐을 버리고 자식 셋을 품에 안고 쓰러졌다.

어릴 적 홍역 때문에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야기도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의식 없는 어린 황수관을 안고 있던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죽은 자식 품에 안고 있으면 뭐해. 빨리 줘. 부모 앞서 죽은 자식은 자식도 아니야!.” 자식을 포기한 아버지가 모질게 말했다.
어머니는 종기로 고름이 흐르는 어린 아들의 얼굴을 혀로 닦아내며 안타까워했다.
하늘도 감동했던 것일까? 며칠 후 어린 황수관은 생기가 돌며 살아났다.

 


◆봉사와 정치의 길


황수관은 정치가 봉사와 애국을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사진은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 선전 벽보.


황수관 박사는 2011년 12월 개도국 보건의료 협력대사로 임명됐다.
사진은 이듬 해 초 필리핀을 방문, 결핵환자들을 대상으로 의료 봉사를 하고 있는 모습.

고난의 길을 헤쳐 온 황수관은 어려운 형편에도, 불우 이웃들에 대한 기부와 봉사를 쉬지 않았다.

태안반도 기름때 제거, 백령도 주민 위로 강연, 오지 주택 보수까지 그는 틈만 나면 봉사에 나섰다.

2011년 12월 개도국 보건의료 협력대사로 임명돼 르완다, 필리핀 등 외국의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는 의외로 정치권에 참여하려 노력했다.
모르는 사람들은 황 박사가 권세까지 탐한다고 수군거렸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는 정치가 봉사와 애국할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그는 1999년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정치에 첫발을 내디뎠다.
다음 해 그는 제16대 총선에서 서울 마포 을 지역구에 출마했으나 2위로 낙선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그는 이회창 총재의 간청으로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경주 국회의원 보선과 비례대표 공천을 노렸으나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는 성공할 것으로 낙관했다.

 


◆느닷없는 종말

 

2012년 12월11일 건강했던 그가 갑자기 경기도 군포시 자택에서 호흡곤란 증세로 서울 강남 세브란스 병원으로 옮겨졌다.
진단 결과 간농양으로 밝혀져 수술을 받았으나 의식을 찾지 못했다.
입원 20일 만인 30일 병이 악화돼 합병증인 급성 패혈증으로 숨졌다.
만 67세, 느닷없는 종말이었다.

유족으로 부인 손정자 씨와 세 자녀가 있다.
‘황수관 박사의 웰빙 건강법’ 등 저서 20여 편과 운동ㆍ건강 관련 논문 100여 편을 남겼다.
이송하 전 연합뉴스 기자

연보

1945년 8월30일 일본 히로시마 부근 출생
1957년 안강북부초등학교 졸업, 포항 영일중 입학
1960년 안강중 졸업
1963년 안강농고 졸업
1966년 대구교대 졸업
1968년 손정자와 결혼
1966년 3월~1979년 10월 초등학교 교사
1978년 대구대 사회복지학과(야간) 졸업
1980년 경북대 교육대학원 체육교육학 석사(야간) 졸업
1981년 5월~1987년 2월 경북대 의대 연구원
1990년 국민대 대학원 생리학 박사 취득
1987년 10월~1999년 10월 12년 간 연세대 의대 생리학교실 교수
1997년 SBS 예능 프로그램 ‘호기심 천국’ 출연
1999년 새천년민주당 입당
2000년 4월 제16대 총선 서울 마포 을 지역구 출마, 낙선
2009년 3월 경북 경주 국회의원 재선거 한나라당 공천 탈락
2010년 대한적십자사 홍보대사
2011년 12월 개도국 보건의료 협력대사 임명, 해외 봉사 활동
2012년 12월30일 67세로 별세

출처: http://www.idaegu.com/?c=11&uid=397350

출처 : 대구일보 | 18.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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