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열린 캠퍼스 > 국민NEW&HOT > 언론속의 국민   RSS

츄리닝, 셀럽과 백수들의 서사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카테고리

츄리닝, 셀럽과 백수들의 서사

디자이너의 손을 거쳐 세상에 나온 모든 물건은 실존보다 본질이 앞선다. 실례로 아무리 근사하게 만들어진 가위라고 해도 물건을 자르지 못한다면, 즉 가위의 본질을 충족시켜주지 못한다면 그 가위의 존재성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이처럼 디자인에서는 기능이 첫 번째 미덕이며 으뜸 되는 본질이기도 하다. 하지만 선진국을 중심으로 디자인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인위적 폐기가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면서 본질에 의문을 가하는 물건, 즉 자르지 못하는 가위, 쓰지 못하는 주전자를 제안하는 등 디자인 행위의 각성을 꾀하는 철학적, 윤리적 행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본래의 기능은 사라지고, 다른 상징과 의미가 붙여진 문화 아이템들이 많은데 스포츠계에서는 츄리닝’이 그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이다.

셀럽들_ 우월한 그들의 츄리닝
‘츄리닝’은 트레이닝복의 ‘ㅌ’이 ‘ㅊ’으로 변환된 것으로 일본식 조어로 볼 수 있는데, 이는 한때 트럭이 ‘츄럭’으로, 트리가 ‘츄리’로 발음되던 식의 잔재이다. 이 단어는 스포츠가 환기하는 미덕과는 다른 층위의 대조적인 뉘앙스를 발산한다. 느슨함, 게으름, 할 일 없음, 무례함, 무관심, 무감각, 나아가 무능력 등등의 느낌까지. 최악의 패션 코드로 세간에 회자되는 것이 ‘감지 않은 머리, 츄리닝 차림에 검정 비닐봉지 들고 옛 애인 만났을 때’인 것을 보면,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약 10년 전에 일어난 츄리닝 열풍이 현재 레트로 현상을 타면서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하고 있다.

트레이닝복을 일상에 유포한 원조는 이소룡일 것이다. 그가 유작인 <사망유희>(1973년)에서 당시 NBA의 농구선수 카림 압둘 자바와 격투를 벌일 때 입었던 강렬한 노란색 점프수트는 잊을 수 없는 명장면을 만들었다고 평가받는다. 자신이 개발한 절권도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주기 위해 재단사에게 특별히 주문했다는 이 츄리닝은 1억 원에 경매되었다. 현재 인터넷 쇼핑몰에서 츄리닝을 치면 가장 먼저 뜨는 검색어이기도 하며, 이소룡의 기합 소리와 더불어, 단 하나뿐인 서사를 지닌 츄리닝이기도 하다. 또한, 영화 <킬빌>(2003)에서 복수의 화신 우마 서먼이 이를 오마주한 노랑 수트를 입고, 화려한 음악에 맞추어 칼을 놀리던 장면 또한 늘 회자된다.

노란색과 검은색의 배합은 주목성이 가장 높은 색이며, 노란색은 그 광휘로 인해 지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세 때 금색이 그 광휘를 가져가면서 노랑은 배신, 마취, 거짓의 상징이 되었고, 유럽에서 일어난 긴 유태인의 배척 과정에서 노란색의 유태인의 별마크를 사용하면서 부정적인 색으로 낙인찍혔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 그 권위를 회복하면서 스포츠계에서는 1919년에 프랑스의 자전거 경주에서 우승자에게 노랑 셔츠를 수여하는 행사가 생겼고, 점차 노란색은 스포츠단의 엠블렘이나 셔츠에 도입되기 시작했다.

트레이닝복에 관한 최고의 명사로는 쿠바의 대통령 피델 카스트로를 들 수 있다. 그는 2006년 수술 후 멋지고 편하다는 이유로 츄리닝을 입고 각국 정상을 예방하고, 교황까지 만났다. 어쨌거나 그는 이 패션으로 스스로가 다른 정상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성공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요가, 헬스, 웰빙 등의 열풍을 타고 할리우드 셀럽들이 몸에 붙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슈퍼나 거리를 활보하는 사진들이 소개되면서 여성들을 중심으로 트레이닝복이 유행을 타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많은 여성 가수나 스타들이 입었는데 그녀들의 수트는 예쁘고, 세련되었으며, 섹시했고, 핑크, 브라운, 하늘색, 그레이 등의 중간색으로 출시되었다. 이런 대스타나 스타일을 위한 츄리닝은 현재 구찌나 발렌시아가가 생산하는 한 벌당 300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혹은 제니퍼 로페즈가 출시한 J.Lo 브랜드를 타고 명맥이 이어진다.

백수들_ 반전 희망의 츄리닝

스타들, 혹은 섹시 스타일의 트레이닝복을 츄리닝이라고 부르기에는 좀 어색하다. 영화나 광고, 혹은 개그 코너 등에서 츄리닝은 언제나 백수나 ‘병맛’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입혀지기 때문이다. 2016년도에 개봉한 재난 영화 <판도라>(2016)의 주인공 재혁은 늘 츄리닝을 입고 등장한다. 감독의 말에 의하면 “재혁은 철없고 동네 바보 오빠 같은 느낌의 캐릭터”이다. 성실하지만 능력이 없어 가진 돈 다 날리고, 원전에서 일하다가 자신의 죽음으로 끔직한 대형사고를 막는 역할을 했다. 그는 작업복 아니면 푸른색 츄리닝만을 입고 등장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2013)에서 주인공 류한은 북한의 소좌이자 남파공작원이지만 서울에 침투해서 바보 역할을 하며 살고 있다. 그가 극 중 내내 입고 있는 옷은 짙은 초록색 츄리닝 한 벌이다. 희생양의 느낌을 주는 이미지인 흰 티셔츠 위에 자연의 색인 녹색을 입고 환히 웃는 모습은 평화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는 그 모습 그대로 살기를 바라지만, 자살하라는 지시를 받은 후, 더벅머리를 자르고 정장을 입고 마을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한 후, 저항의 영웅적 결말을 준비한다. 이뿐 아니다.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2012)에서도 사고로 현대로 온 왕세자 이각과 그의 호위무사들은 내내 빨강, 노랑, 초록, 파랑의 츄리닝을 입고 등장하여 부적응자로서의 모습을 코믹하게 보여준다. 원시적 생명력을 품은 자연의 색이기에 그야말로 ‘촌스러운’ 이런 원색의 츄리닝은 ‘백수 츄리닝’이라는 네이밍 아래 꾸준히 판매되고 있다. 지난 3월에는 현재 최고 인기를 구가하는 <내일은 미스터 트롯>에서 장민호의 “역쩐인생(가난한 남자)” 백댄서 6명이 원색의 츄리닝을 입고 가난과 역전인생을 희화하는 춤을 추기도 했다.

이런 츄리닝을 입은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보, 건달, 부적응자, 무능력자 등의 캐릭터이다. 하지만 그들은 사실 영웅이었고, 무서운 실력파 공작원이며, 왕세자이기까지 하다. 그들의 실존은 비록 촌스러운 츄리닝을 입은 후줄근한 백수의 모습이지만, 본질은 인정받고 흠모받는 반전을 품은 캐릭터인 것이다. 근래에는 섹시한 츄리닝을 입는 여성보다 커다랗고 헐렁한 츄리닝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치고 다니는 젊은 여성들이 많아졌다. 여성의 츄리닝 전용 방식도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츄리닝은 스포츠 분야에서 편한 운동복이라는 본질적 기능을 띠고 태어났지만, 극심한 경쟁과 성공 신화의 사회 속에 사는 한국 젊은 남녀에게는 자신의 존재를 당당히 입증해 줄, 반전의 미학을 꿈꾸게 하는 역설적 대리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영화 <사망유희>에서 강렬한 노란색 점프수트를 입은 이소룡           영화 <킬빌>에서 이소룡을 오마주 한 우마서먼

 

 

    영화 <판도라>에서 늘 츄리닝을 입고 등장하는 주인공 '재혁'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에서 코믹함을 표현한 색색깔의 츄리닝


트레이닝복을 입고 교황을 예방한 쿠바 대통령 피델 카스트로

글을 쓴 조현신은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
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
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화에 관심이 많다. 2018
년 『일상과 감각의 한국디자인 문화사』를 출간했다

 

※ 게재한 콘텐츠(기사)는 언론사에 기고한 개인의 저작물로 국민대학교의 견해가 아님을 안내합니다.

 

출처 : 서울스포츠|2020.05.06 2:49
목록 출력 스크랩